커피덕후, 쵸콜릿을 만나다
차분한 공기의 일요일 오후. 보스톤 근교의 Arlington이라는 조용한 도시의 손바닥만한 로스터리 카페, Barismo(바리스모)가 터져나갈 듯 문앞까지 사람으로 꽉 차있다. 곧 시작될 ‘Coffee and Chocolate’ 이벤트를 손꼽아 기다린건 커피덕후인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거구나… 그렇다면 당신들도? 흠…눈이라도 마주칠까 서로 머쓱하게 시선을 피하는 모습들이 덕후의 충분조건을 만족하는 듯. 게다가 이곳은 먼저 말 건내기로 유명한 미국이 아니던가. >.<;
분주하게 바에서 준비되고 있는 커피 그라인딩 소리와 융드립으로 추출되는 향긋한 커피향에 시달리며 다들 입가에 침고인 미소만 머금고 있고…점점 출출해 지는 오후시간. 빨리 입에 커피와 쵸콜렛을 물려 달라!
사실 이곳은 커피에 관한 얘기 말고는 빈 말 같은건 할 줄 모르는 젊고 고집스런 커피긱(Geek:덕후^^) Jaime가 주인장으로 있는 곳. 고품질 생두소싱과 신선한 커피 로스팅, 그리고 pourover(푸어오버:미국에서 핸드드립을 부르는 명칭)방법론 전파 등 오로지 커피 품질 향상에만 관심있던 그가 느닷없는 쵸콜릿 시식이라니? 나를 비롯한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들을 보니 그가 화두를 제대로 던진 것 같긴 하다. 아…궁금해.
그 순간 내 손에 들려진 금빛 용지 하나. 앞뒤로 빽빽하게 한 면엔 커피, 다른 한 면엔 쵸콜릿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오늘 맛볼 커피는 과테말라와 코스타리카 커피 각각 두종류. 그리고 쵸콜릿은…페루, 마다가스카, 도미니카공화국, 베네수엘라 이렇게 원산지가 각각 다른 4종류. 헉. 커피만큼 다양한 원산지와 소싱배경, 농장특성에 제조과정까지 자세히 적혀있고, 게다가 먹기도 전에 침이 고이는 다양한 테이스팅 노트까지… 아. 쵸콜릿 너. 커피와 참 많이 닮아있구나.
이 심상치 않은 Rogue Chocolate은 25세 청년Colin 이 카카오빈을 소싱하는 것 부터 씻고 볶고 갈고 정제하고 만들어 포장까지 모두 직접 한 ‘진짜’ 수제쵸콜릿. 이 자세한 상품설명이 판매되는 각각의 포장지에 빼곡히 적혀있는 걸 보니, 커피 포장지에 온갖 원두정보 및 로스터 싸인까지 넣는 이 곳 커피집 주인의 열정과 많이 닮아 있었다. 결국 오늘. 커피와 쵸콜릿에 한 고집과 한 열정하는 비슷한 두 젊은이의 야심찬 작품 시식회인 셈. 아- 순간 난 약간의 소름이 돋았다.
드디어 맛보기 시작. 오늘 시식은 총 4라운드. 네 종류의 커피와 네 개의 쵸콜릿이 가장 잘 어울리는 짝을 만나 서빙되었다. 각 라운드마다 물, 커피, 쵸콜릿 한조각이 주어졌고, 쵸콜릿 먼저 살짝 부수어 손에 올려놓고 향을 맡은 후 맛을 충분히 음미한 후에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살짝 입을 헹구고 다시 쵸콜렛…새콤 달콤 쌉싸름함의 무한 릴레이. 첨가물이 들지 않은 신선한 커피와 쵸콜릿, 이 둘의 맛이 얼마나 많이 닮아 있던지… 마치 쵸콜렛을 녹이면 커피가 될 것도 같고 또 커피를 굳히면 쵸콜렛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맛보기 전후로 각 커피와 쵸콜렛의 소싱배경과 특성, 농장환경 등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먹으니, 큐레이터가 따로 없구나 싶다. 알고 먹는 맛 역시, 그 깊이와 예리함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말솜씨가 유려하지 않아도 좋았다. 마치 커피체리와 카카오 열매를 나도 만져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니…
나의 오감을 사로 잡았던 건 두번째 라운드, 과테말라 El Bosque 커피와 Sambirano 쵸콜릿이었다. El Bosque는 ‘숲’이란 뜻의 안티구아 근처의 Sacatapequez 지역 Bourbon 커피로 올해 재배된 신선한 커피라고 한다. 사과향이 느껴지는 상큼하면서도 살짝 쌉쏘롬하게 볶아진 커피에 아프리카 Madagascar(마다가스카)의 Sambirano Valley가 원산지인 쵸콜릿의 밝고 톡쏘는 과일 신맛은 꼭 케냐 커피를 마시는 듯 했다. 쵸콜릿이 이렇게 상큼하고 가벼울 수 있는 건지 처음 알았다. 게다가 이 둘의 끝맛이 너무 깔끔해서 물이 필요 없을 정도. 내 세치 혀의 호강의 끝은 어디일런지…그 외에도 베네수엘라 쵸콜렛에선 커피 맛, 호두 맛, 그리고 오렌지향과 살짝 매콤한 느낌까지 나는게 쵸콜릿 한조각 그 자체로도 다양한 디저트를 먹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 이제 쵸콜릿 덕후로 가는 건가? =_=;
시식하는 내내 ‘음~음~’ 소리 말고는 별 말이 없던 사람들. 아마 다들 제대로 된 커피를 처음 만났을 때 처럼 쵸콜릿의 세계로 첫 발을 내딛는 소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커피에서 우리가 열광하는 원산지와 재배환경, 추출방법에 따른 다양한 맛의 세계. 동시에 그 재배/유통과정의 불균형한 색까지 닮아 있는 커피와 쵸콜릿. 커피덕후가 커피 고르듯 이제 쵸콜릿 포장지도 360도 회전시켜가며 이것저것 따져 보고 있을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날 밤. 쵸콜렛 위키 백과사전을 읽고 있었던 건 나 만은 아닐 듯.
-본 글은 웹진 카페인:콩부인의 화두(火豆)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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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Beanwife
November 5, 2010 at 6:08 am
Posted in 커피 문화(Coffee Culture), 콩부인의 화두(火豆) Column
Tagged with Barismo, Coffee and chocolate, 바리스모, 수제 쵸콜릿, 커피 덕후, 커피 칼럼, 커피와 쵸콜릿, Rogue chocolat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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